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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는 ‘한샘’, 그는 누구인가

 

                                                                           박경현(국어64, 경찰대명예교수)

 

‘밑줄 쫙~ 원조 스타강사’, ‘전설의 스타 국어강사’, ‘가슴 속의 국어 1타 강사’, ‘모방할 수 없는 불후의 명강사’, ‘레전드 국어’, ‘국내 최고의 국어강사’, ‘전 타임 마감, 강사의 신화 창출’......

 

지난 5월 6일 각종 대중매체에서 서한샘 선생의 부음을 이렇게 알렸다. 80년대 ‘한샘국어’로 공부했던 수많은 분들이 빈소를 직접 찾아오고, 온라인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글이 봇물을 이루었다. 근래 그에게 강의를 듣던 공무원 지망생들, 전혀 일면식도 없으면서 전설을 만나고 싶다며 찾아온 청소년들,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이 조위를 표했다. 그는 분명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특유의 교수법 개발

 

그는 1964년에 우리 과에 입학하여 1969년 졸업하고 자신의 모교 인천 동산고 교사, 서울 대광고, 홍익여고 교사를 거쳐 1978년부터 학원가에 뛰어 들었다. 1980년 처음 대입 단과반 강의를 시작하며 예비고사 ‘한샘국어’라는 책을 냈다. 당시 정부에서 본고사와 과외금지 정책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자 예비고사만을 대비해서 쓴 그의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 책은 종래의 참고서와는 달리 ‘기본문제→나온 문제→나올 문제→종합평가’의 귀납적 체재를 갖춘 문제집 겸 참고서였다. 이런 학습의 틀은 종래의 국어학습지도 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는 학원에서 제자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열정적으로 리드미컬(rhythmical)하게 강의를 하였다. 풍부한 유머와 간간이 들려주는 노랫가락에 수강생들은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의 강의를 들었다. “한창 때는 제 강의를 한꺼번에 7백여 명씩 듣기도 했어요. 이런 강의가 하루 다섯 차례였으니 매일 3천 5백 명의 학생들을 만난 거죠.”라고 회고하곤 했다. 그가 수업 중에 중요한 내용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했던 ‘밑줄 쫘-악’, ‘돼지꼬리 땡야’, ‘동그라미 꽁야’, ‘진달래 땡야’ 등은 일약 학원가의 유행어가 되고 전국으로 물 흐르듯 번져나갔다. 그 후 여러 대학원에서 서한샘만의 교수법 강의를 요청했고, 학원가 예비 강사들은 그에게 연수를 받기도 했다. 한때는 서한샘의 영향을 안 받은 강사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학창시절 그의 강의를 들었던 현재의 학원가 주류 강사들은 그의 교수법을 이어 가거나 변형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1989년 과외금지가 위헌 판결을 받자 정부는 사교육 고액과외를 퇴치해 보려고 특급 강사를 영입해 KBS 3TV(현 EBS)를 통해 전국의 수험생들이 질 좋은 강의를 시청할 수 있게 했다. 그의 탁월한 강의는 전국적으로 화젯거리가 되었다. 전국 최고의 스타 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이 같은 모습은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기도 했다.

 

-"네 꿈을 펼쳐라"

 

1983년 그는 노량진에 '한샘학원'을 설립했다. 그의 꿈은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많은 재수생들에게 “네 꿈을 펼쳐라.”라는 격려의 말로 큰 힘을 실어 주었다. 이 외침은 그의 좌우명이자 한샘학원의 원훈이기도 하였다. 끊임없이 젊은이들에게 “젊은 시절에 운명처럼 몰려오는 시커먼 폭풍우가 너를 덮친다면 굳이 피하지 말라. 오히려 그 폭풍우를 끌어안고 고통의 아픔이 어떠한 색깔인지 잘 살펴보라. 그리고 견뎌내라. 세월이 흘러 그 시커먼 폭풍우가 저만큼 물러간 뒤에 우리는 스스로를 추슬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한때의 고통. 그것은 나를 성장시켰다.”라고 희망을 부어 넣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학교를 다니면서 고생하며 배워야 하는 고학생(苦學生)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집안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며 공부해야만 했다. 대학 졸업 때까지 노동판에 뛰어 들어 고철 줍기, 야산에서 흙 파기, 짐수레 끌기, 신문팔이, 찹쌀떡 장사, 조개 캐기, 생선 장사, 가정교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 고통스러운 젊은 세월을 겪었다.

대학 진학도 장학금을 탈 목적으로 그 무렵 가장 인기 있는 화공과에 합격은 했으나 입학금을 먼저 내야만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규정으로 입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성적만 좋으면 미국 유학도 시켜 준다는 공군하사관 모집에 응해 직업군인이 되려고도 했다. 빨리 수료하고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 불쌍한 어머니를 모실 수 있다는 소망 하나로 교육대학(당시 2년제)을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왕 교사가 된다면, 자기와 같은 환경의 아이들에게 참벗이 될 수 있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1964년 그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조심스럽게 원서를 냈다. 20명 모집에 364명 지원, 18.2대 1. 당시 서울대 전체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았다. 그는 과 수석을 차지했다. 당시 그의 성명은 서용웅(徐勇雄)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주신 ‘도무지 알 수 없는 기적’이라고 두고두고 겸손을 떨었다.

 

-청소년 교육문화에 매진

 

그는 자신의 눈물겨운 젊은 시절을 생각하며 다음 세대들에게 맑고 밝은 미래를 열어주려고 애를 썼다. 청소년 장학문화사업을 전개하고, 해마다 불우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무심히 사용되는 무분별한 외래어 혼용을 막고 한글 파괴현상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청소년을 위한 ‘한글티셔츠입기운동’을 여러 해에 걸쳐 전개하였다. 1987년에는 청소년들의 바람직한 품성 개발에 도움이 될 만한 청소년 잡지 ‘우리시대’를 창간하였다. 월간지 ‘대학으로 가는 길’을 창간해 진로 선택에 망설이는 학생들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또 1993년에는 고액의 사교육비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방송 전문채널인 ‘다솜방송’을 설립해 교육복지운동을 펼쳤다. 2009년에는 인천광역시인터넷교육방송 ‘잎새방송’을 설립, 약 2만여 명의 초, 중. 고 학생들에게 장학교육을 펼쳐 공부나눔운동을 실천했다. 이 방송 서비스로 사교육비 부담을 해소하고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균등한 교육기회를 주어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는 교육환경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2013년 이후에는 공무원 취업준비생을 위한 무상(無償) 강의 장학교실을 운영하였다.

 

-국어교육연구의 바탕 마련

 

경향 각지에 ‘한샘학원’ 간판을 단 학원들이 생겼다. 학원들은 자발적으로 그가 설립한 한샘출판사의 ‘한샘국어’, ‘한샘현대문’, ‘한샘고전’ 등 30여 종의 학습서를 교재로 썼다. 서한샘 선생의 저술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한샘출판사에서 발간한 TV방송교재는 장안(長安)의 지가(紙價)를 높였다. 그후 한샘출판사는 수많은 학습서뿐 아니라 많은 전문서적을 출간했다. 그는 수지 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국어교육과 동문들의 저서를 발간해 주었다. 다수의 사범대학 졸업생의 취업을 알선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우리 과의 ‘국어교육연구소’ 설립 기금으로 1억 원을 쾌척하여 국어교육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데 필요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퇴임하신 우리 과 은사님께 연구실을 제공하고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출판사에는 많은 후배 동문들이 임원 또는 직원으로 종사하였다. 이 회사를 거쳐 간 동문들은 나중에 대학교수나 출판사 대표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는 문학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문학지 ‘수필공원’, ‘시조생활’ 등을 발간하는데 수년간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최초의 국어교육 신문 ‘국어교육월보’을 발행해 국어교육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기도 했다.

 

-교육적 의정 활동

 

그는 활동영역을 넓혀 초대와 2대 민선 서울특별시 교육위원으로 서울 교육 발전에 헌신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정치권의 끈질긴 종용과 회유로 그의 고향 인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의 의정활동도 강의 못지않게 의욕적이었다. 국회 교육위원회 간사로 교육3법, 한국교육방송법 등 교육 관계법 제정을 주도했다. '전문대학'의 명칭을 '대학'으로 고치는 데 앞장섰고 '만 5세 이하 어린이에 대한 무상교육의 법제화'에도 기여했다. 그는 대정부 질문에서 “공교육이 튼튼하게 자리잡기 위해서 우리는 교사를 존경하는 풍토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진짜 ‘선생님’에게만 사용합시다. 이제 일반적인 호칭으로 널리 쓰입니다만, 앞으로는 ‘선생님’이라는 말은 교사에게만 붙이는 고유명사화 운동을 펼칩시다. 그리고 ‘스승님’이라는 표현을 자주 애용함으로써,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도록 합시다.”, “학교교육이 중심이 되기 위해서 어찌해야 하는가? 그것은 공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학교 선생님들의 사기를 앙양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육개혁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교사가 주체가 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교육은 선생님의 제자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끝없는 연구와 교수에 의하여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사들에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발언하여 일선교사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교육자로서 정치권에 들어간 것을 그는 자기 생애의 ‘빗나간 외도’였다고 자책을 하고 ‘내 팔자는 학원강사’라고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돌아온 최고령 강사

 

그는 1998년 외환위기 때 다솜방송과 출판사 등이 부도가 나며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자금난과 구조조정 등 고통의 연속이었다. 재기를 노리며 다시 시작한 출판사업도 여의치 않았다. 교육비 부담으로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 자녀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확대해 교육 평준화의 장이 되길 기대하며 추진했던 ‘잎새방송’도 난관에 부딪쳤다.

2011년 말 전설의 서한샘 선생은 노량진 학원가로 다시 돌아왔다. 파란만장한 인생여정이 시작되었던 교육 현장, 결국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교실, 여기에서 그는 최고령 강사로 공무원시험 국어강의를 혼신의 힘을 다해 열강을 했다. 공시생들의 수강료 감면과 오프라인 중심 장학금 혜택을 주며 몇몇 합격생을 배출하여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시험 준비생들에게 공무원시험을 단지 취직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며 국민을 위해 헌신한다는 가치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나지막하게 조언도 해왔다.

 

-남다른 모교 사랑

 

인천 동산중고등학교는 청소년 시절 장학금으로 학업을 이어가게 해준 모교다. 그는 후배들에게 수년간 아낌없이 장학금을 주어 보은(報恩)을 해왔다. 또한 오랜 기간 동창회장으로 전통의 동산고 야구부를 후원해 세계적인 투수 류현진을 배출하는데 선봉에 서기도 했다. 학교 당국은 이번 고인의 장례식을 학교장(學校葬)에 준하는 예식으로 치렀다. 야구부 학생들이 운동장에 도열해 거수경례로 고인을 애도했다. 그가 건립한 동산학교 교정의 ‘東山人이여 네 꿈을 펼쳐라’라는 격려비에는 절절한 모교 사랑이 새겨져 있다.

201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창회에서는 방송매체를 통한 사교육 대체(代替), 청소년 문화 활동의 다양화, 사제동행의 사표(師表), 모교 발전 적극 후원 등의 공적을 기리어 청관대상(淸冠大賞)을 수여하였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자기의 인생에는 굴곡이 많았고 전성기 매우 짧았다는 고뇌를 토로했다.

 

 

-“이젠 편히 쉬시오”

 

지난 1월 그는 폐암 투병 사실을 지인들에게 알렸다. 매일 새벽마다 자신의 간증을 녹음해 보내주기도 했다. 서한샘 권사는 “그동안 하나님 가까이 가지 않았더니 하나님이 혼내시느라고 사탄 병마를 일시 허락하셨나 봐요. 부랴부랴 하나님께 자복하여 은혜를 빌고 있어요. 능히 사망의 권세를 이겨낼 줄로 믿습니다.”, “성경 말씀이 꿀같이 달아요.”라며 쾌유를 기약했다.

 

몇 주 전 모임에서 한때 TV 음악프로를 진행할 정도로 절창(絶唱)인 그가 ‘오 솔레 미오’를 한 옥타브 낮게 불렀다.

 

‘폭퐁우 지난 후 대기가 조용한 태양의 날은 정말 아름다운 것. 그러나 더 아름다운 태양은..... 나의 태양, 너의 얼굴 속에 있다.....’

 

후배 한 분이 ‘내 마음의 강물’을 답가로 공손히 불렀다.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한샘’!

한민족의 샘, 한글문화를 크게 발전시킬 샘, 유일한 샘, 한복판에 있는 샘......

 

그는 그렇게 한샘의 전설을 남기고 75세를 일기로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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