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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잎새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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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십대 제자들이
118세 되시는 은사님 묘소에
참배하러 갔다.


제자들은 대학 동문이고
몇분은 사제 관계이기도 하다.


서울 분당 등지에서 떠나
대전역에서 합류해
대전 도시철도를 타고
현충원역에서 보훈처가 제공하는
'모시미' 셔틀버스로
국립대전현충원에 도착했다.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이 탁(李鐸) 선생님께
대전에 거주하는 90대 제자가
손수 마련한 북어 한 마리, 사과 한 알,
술 한 잔 올리고 고유문(告由文)과
추모시 낭독에 이어 큰절을 드렸다.

 

'나라 잃은 슬픔 안고 스물 두 살
젊은 나이로 떨쳐 일어섰네.
차가운 만주벌 병영에서,
靑山里 혈전에서
日帝에 항거하여 싸우셨네.
모진 옥고 겪으시며 울분도 삼키셨네.
힘으로 못 이룬 光復의 꿈을
우리말 우리글 연구에 쏟으시며
朝鮮語學會 회원으로,
五山高普에서, 서울師大에서
人材敎育에 일생을 바치시니
선생의 뜻 등불되어 비추리라.'
비문의 全文이다.

 

멩재(命齋) 이 탁 선생님은
1898년 태어나 1967년에 작고하셨다.

어려서는 한문을 공부하고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장지영(張志暎)에게서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가서

신흥군관학교를 마치고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만주 화림학교 교사로 있다가,
'신단민사(神檀民史)' 보급 건으로
검거되어 복역하였다.

 

오산학교에서도 일했으며
한글학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말사정위원 등을 지냈다.
8·15광복 이후 1961년 정년퇴임 때까지

서울大學校 師範大學에서
국어학을 가르쳤다.

 

선생님의 학문은
고증학에 근거를 둔
독특한 견해와 연구방법으로,
한국어와 중국어에 공통한
계통적 음운규칙과
한자음의 체계적 변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말의 語源,
鄕歌에 대한 재해석 등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선생님께서 기술한 음운규칙에 근거해
小倉進平이나 梁柱東이 해독한
향가 25수에 대하여 잘못 되었다고
생각된 부분을 고쳐서 해독한 것은
新羅語를 재구성한 독특한 견해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논문 중에서
가장 독자적이면서 광역화되고
심혈을 기울인 대변적인 것은
'언어상으로 고찰한 선사시대의
환하 문화(桓夏文化)의 관계'라고 한다.
특히 훈민정음은 세종 이전부터 있었고

훈민정음의 전신이 탐라문자(耽羅文字)요,

이의 전신이 고대문자라는 주장은
학계의 주목을 끌만한 학설이다.

 

선생님은 성품이
인자하고 성실하신 분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던 교육자이셨다.

1968년 3월 1일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묘소 참배에 동참한 安白은
선생님께서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정년퇴임하셔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배님들과
오랫동안 교류해 오면서
이 탁 선생님의 뜨거운 나라사랑과
따스한 師弟의 정,
독특한 국어 연구 방법에 대해
전설 같은 회고담을 자주 들어왔다.

 

8십대 9십대 노학자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고인이 된
은사님을 찾아뵈는 모습에
모든 걸 낮출 수밖에 없었다.

 

선생, 은사, 스승, 師父一體....
이런 단어의 참뜻이 사라져가는
세상의 끝자락을 움켜잡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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